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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현재에 살게 하다



디자인에 워낙 관심이 많은 터라 한때는 패션과 인테리어 잡지는 물론 디자인 책들을 있는 대로 섭렵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보그>에서 한복 패션 화보를 보게 되었는데,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단발머리 소녀가 풍성하게 부풀려진 치마를 움켜쥐고 있었고, 머리에는 광주리를 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입고 있는 한복이 유난히 이채로웠다. 선명한 초록색 치마와 노랑 바탕에 진분홍 꽃무늬가 새겨진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초록과 진분홍, 민무늬와 화려한 무늬의 강렬한 대비가 오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그때 그 이름을 기억했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그리고 이후 줄곧 잡지에서 그녀의 작품으로 촬영된 화보가 나올 때면, 전통을 콘셉트로 하는 일을 맡게 될 때면 다시금 그녀에게 주목했다. 그녀는 매번 한복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주었다. 단아하거나 고혹적인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얼마든지 자유롭거나 몽환적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최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 후, 이제야 그녀가 하고 있는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 시대 디자이너로서 ‘차이 김영진’을 통해 전통을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취향과 스타일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그런 그녀가 최근에는 한복에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가미한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을 선보였다. 그간 다져온 ‘차이 김영진’의 역사를 바탕으로 백년을 이어나갈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며. 지금껏 걸어온 그녀의 행보를 보면 그 ‘대단한 도전’이 결코 무모해보이지 않는다.​ 





나만의 프리즘으로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다 

전통과 현대를 매치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그녀는 자신의 감각이 경험으로 체화된 것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사회 초년 시절에는 연극을 하 소품과 의상을 만들었고, 이후 10년 넘게 패션 분야에서 판매, 바잉(buying), 직원 트레이닝 등을 두루 경험하며 소재와 패턴을 익혔다. 이 모든 역사가 그녀만의 디자인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경험으로 얻은 감각을 토대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열어나가고 있는 김영진이 디자인과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녀의 작품은 지극히 몽환적이다. 짙은 초록 치마에 알록달록 꽃무늬 저고리, 풍성한 주름이 잡힌 하늘색 치마에 살포시 비치는 레이스 저고리, 겹겹으로 부풀려진 분홍빛 치마에 몽글몽글 자수가 놓인 저고리…. 흔히 보던 디자인이 아니어서 ‘이렇게도 한복이 될 수 있구나’ 싶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아름답고 신비롭다. 저고리 아래로 살짝 허리선이 보이거나 살포시 올라간 치마 아래로 이채로운 디자인의 속치마가 드러나면 여성성이 한껏 발현되면서 더욱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감탄하고 나면 과연 이런 한복을 만든 디자이너는 누굴까 궁금해진다.


그 궁금증의 주인공은 바로 한복디자이너 김영진.

2004년 전통 한복 맞춤 브랜드 ‘차이 김영진’을 론칭하고 자신만의 감성을 담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2013년에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을 론칭하며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제는 프랑스 장식미술박물관이나 밀라노 엑스포 등에서 초청을 받으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우뚝 섰다.


“차이 김영진을 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젊은사람들은 왜 한복을 입지 않는 거지? 한복이 예쁘면 입지않을까? 그럼, 내가 입고 싶은 한복은 뭐였지?’ 이런 질문을 했죠. 생각해보니 내가 입고 싶은 한복은 꿈이 담긴 거였어요. 현실에서는 무채색의 평범한 옷들을 입더라도,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 날이나 돋보이고 싶은 특별한 날에는 가장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는 꿈이요. 그 꿈을 실현해주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일까. 그녀가 디자인한 한복들에는 극대화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차이(差異)’라는 이름처럼 기존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다. 때론 몽환적이고, 때론 고혹적이며, 때론 생기발랄하다. 김영진만의 프리즘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이미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표현하는 방법들이 새롭다. 우연히 발견한 30~40년대 흑백 사진에서 외교관 자녀가 레이스로 된 한복을 입은 걸 모티프로 삼기도 하고, 그 옛날 결혼식 사진에서 본 한복에 면사포라는 매치를 재현해내기도 했다.


“그 옛날 풍경 속에서 봤던 모습들을 예쁘게 되살려내고 싶었어요. 전통 소재가 갖고 있던, 단정하고 고상한 이미지를 깨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거나, 서양 소재에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면 재미있을 것 같았죠. 그렇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표현해내는 데 주력했어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전통과 현대의 믹스 앤 매치를 다채롭게 시도해왔다. 레이스 원단이나 벨벳, 린넨으로 한복을 만들기도 했고, 이런 원단을 모시, 생고사, 양단, 명주 등 전통 소재와 매치하기도 했다. 때론 옷감에 비즈를 달거나 자수를 놓기도 했고, 레이스를 덧대기도 했다. 소재뿐만 아니라 패턴과 색감 면에서도 자유로운 감성을 담아냈다. 은은하고 잔잔한 꽃무늬부터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무늬, 과감하고 농익은 꽃무늬까지 다양한 꽃무늬 패턴을 자유자재로 활용했으며, 한없이 깨끗한 하얀색부터 차분한 느낌을 주는 옥색, 분홍색, 하늘색은 물론, 선명한 빛깔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초록, 빨강, 파랑, 검정까지 색감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감성을 입고 태어난 옷들은 아름다움의 전형을 깨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으며,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한복도 아주 유연하게 변화할 수있는 옷이라고 봐요.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데 기존에는 상상력을 너무 가뒀던 거죠.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서 한복은 이미 창의적인 복식이었어요. 시대마다 집안마다 입는 방식이나 디자인등이 조금씩 달랐거든요. 바로 ‘우리 시대에 우리가 입는 옷’이었던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2016년 한반도를 살고 있는 차이 김영진이 디자인하는 한복이란 것, 그걸 우리 시대 사람들이 입는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렇게 그녀는 나름의 길을 걸어왔고 그녀가 선보인 독보적인 디자인은 먼저 젊은층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들은 결혼식에서 어머니가 골라주는 한복 대신에 자신이 입고 싶은 한복을 직접 골라 입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나둘 결혼식이나 특별한 날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을 위해 디자인된 한복을 입고 나서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러면서 차츰 ‘차이 김영진’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패션계의 러브콜을 받는 일도 많아졌다. 수많은 패션 화보 속에 작품을 등장시키며 ‘차이 김영진’만의 스타일을 부각시켰고, 내로라하는 패션 브랜드들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을 론칭하면서 다시 한 번 패션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전통 한복 맞춤 브랜드인 차이 김영진은 누구나 입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어요. 우리나라에는 백년이 넘는 브랜드가 없다는 게 디자이너로서 늘 안타깝기도 했고요. 그동안 정통성 있는 브랜드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우리는 차이 김영진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바탕으로 기성 브랜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차이킴은 공방이 아니라 공장에서 만드는 옷이죠. 아직은 소량으로 제작되고 있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인 건 분명해요.”

차이킴의 콘셉트는 ‘유랑’. 한국 전통 연희 중 하나인 남사당패의 자유롭고 노마드한 감성을 담았다. ‘옷이라는 것도 하나의 물질이긴 하지만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며, 그로 인해 입는 이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출발했다. 김영진은 이러한 콘셉트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을 바탕으로 실용성과 감각적인 디자인을 겸비한 옷들을 탄생시켰다. 고려시대 문부백관들이 입던 관복인 철릭에서 힌트를 얻어 디자인한 철릭원피스를 시작으로, 출토복식을 응용해 만든 ‘연안김씨저고리’, ‘순천김씨저고리’, 갓난아기의 배냇저고리를 재해석해 만든 ‘깃 있는 배냇저고리’, 옆트임이 있는 조선시대 남자 옷인 답호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든 ‘답호 코트’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SNS에 철릭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이 원피스는 버버리코트처럼 특정 디자인을 상징하는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영화 <설국열차>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답호 코트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차이킴이 인기를 끌면서 ‘차이 김영진’도 덩달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프랑스 장식미술박물관에서 ‘파리, 일상의 유혹’이라는 특별전을 열었으며, 2015년에는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의 의뢰로 전시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세계적인 패션 잡지 <보그>의 인터내셔널 에디터 수지 멘키스(Suzy Menkes)가 SNS에 ‘차이 김영진의 한복은 매우 아름답고 디테일이 좋다’라는 평을 올리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디자이너로서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에요. 디자이너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스스로 가치를 느끼게 되는 존재거든요. 모네나 드가 같은 훌륭한 예술가들도 결국 사랑을 받기 위해 예술 활동을 펼쳤던 것이고요. 입는 사람들이 있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인정받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건 즐거운 작업이죠.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 늘 긴장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그게 또 재미있기도 해요.”


대중에게 사랑받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늘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정직한가, 정의로운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정직하지 못함이나 정의롭지 않음이 누군가에게 고통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전통에서 모티프를 얻고, 그것에 힘입어 창작을 하며 또 사랑받고 있기에. 우리 것, 우리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만큼이나 스스로 이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작업에도 그런 마음을 담아낸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한국적 정서와 가치를 진정성 있게 담아내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닦는 길에, 그 길에서 피어난 그의 작품들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길 바란다.

기획 및 진행: 조영혜 객원기자 / 디자인: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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